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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정년이〉 대담 (하): 퀴어서사를 둘러싼 복잡한 마음들

2025년 2월 17일

박주연ㆍ연혜원ㆍ문아영


문아영:

그렇다면 두 분이 드라마를 보면서 매력적으로 느꼈던 인물과 커플링은 무엇이었나요?


박주연:

저는 옥경과 혜랑 커플이 좋긴 한데, 제가 퀴어베이팅을 당한 역사가 너무 오래되고 그만큼 큰 실망감을 느껴서 다시 퀴어베이팅을 당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요. 그래서 드라마 〈정년이〉를 보면서도 심적인 거리를 좁히기 어렵더라고요. 게다가 제가 지금 태국의 GL 콘텐츠를 덕질하고 있어요. 찐들이 저기 있는데 제가 굳이 여기에 매달릴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도 여성국극 공연을 볼 수 있었던 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공연에 관한 장면들은 모두 재밌었어요.


연혜원:

저는 정은채 배우님을 오랫동안 좋아했고 인간적으로 응원해 왔어요. 만약 정은채 배우님이 아니었다면 드라마를 보지 않았을 거예요. 실제로도 정은채 배우님이 옥경 역을 너무 멋있게 소화하셨고 그게 저한테 드라마 〈정년이〉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이었어요. 또 정은채 배우님과 김윤혜 배우님의 합이 정말 좋았어요. 이렇게 퀴어베이팅을 하는 드라마에서 이 정도의 텐션을 만들어 낸 건 전적으로 배우들의 힘이 컸다고 생각해요. 이밖에는 신예은 배우님의 연기를 처음 봤는데 되게 좋았고요. 하지만 각 배우에 대한 애정이 있었던 것뿐이지 드라마 자체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어요. 연출적으로 좋았던 건 딱 한 가지인데, 정은채 배우님의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게 한 거예요. 그 안목은 좋았다고 생각해요.


문아영:

저는 웹툰을 볼 때만 해도 정년과 부용에게 빠져있어서 다른 인물에게 그다지 몰입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모든 캐릭터가 배우의 외피를 입고 등장하니 충격적일 만큼 좋더라고요. 그리고 극 중에서 혜랑이 여왕 펨으로 나오잖아요. (웃음) 김윤혜 배우님이 연기하는 혜랑이 너무 좋아서 한동안 비공개 SNS 계정에 혜랑 공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으면서 놀았어요.


연혜원:

저도 비공개 SNS 계정에서 옥경 얘기밖에 안 해요. (웃음)


문아영:

이외에 새롭게 다가온 캐릭터가 주란이었어요. 원작에서는 주란이 정년과의 관계성보다 여성국극 배우로서 무대에 서는 일에 더 골몰하는 인물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원작의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드라마에서 정년의 상대역으로 주란을 붙여놓으니 또 새로운 매력이 느껴지더라고요. 주란 역의 우다비 배우님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됐는데 앞으로 관심 있게 보게 될 것 같아요.


연혜원:

우다비 배우님이 정말 재밌는 분이더라고요. 예전에 인터뷰하신 내용을 보니까 본인은 여자친구와 있을 때 더 편한 스타일이고 애니메이션과 아이돌을 덕질하는데 (여자)아이들과 우주소녀를 좋아한다고 하시더라고요.1) 게다가 드라마 종영 이후에 하신 인터뷰를 보면 한동안 휴대폰 배경화면이 정은채 배우님이었다고 말씀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지금 우다비 배우님과 X(구 트위터)의 타임라인을 공유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이야기했던 게 기억나요.2)


문아영:

드라마 〈정년이〉의 주요 시청자가 누구였을까를 생각하면 퀴어당사자와 원작의 팬, 여성국극의 팬, 드라마의 팬, 배우의 팬 등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주변에서 접한 반응 중 인상 깊은 내용과 활동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박주연:

듀나님께서 작년부터 꾸준히 부용의 캐스팅 소식을 기다리는 트윗을 X에 남기신 걸 보고 정말 찐이시라는 걸 느꼈어요. 최근에는 앞서 언급한 칼럼 「‘정년이’가 대박 났다고 지레 겁먹고 뒤로 빠진 각색자들이 용서되는 건 아니다」도 쓰셨잖아요.3) 갖고 계신 분노가 잘 느껴지는 글이었는데, 새삼 드라마에서 부용을 삭제한 문제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줬다는 걸 다시 느낄 수 있었어요.


연혜원:

저는 요즘 팬들이 쓴 옥경X혜랑의 팬픽을 재밌게 보고 있어요. 팬들이 정은채 배우님과 김윤혜 배우님의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를 종합해 팬픽을 쓰고 영상을 편집한 것들을 즐기는 중이죠. 그래서 제 X의 타임라인은 드라마의 제목이 〈정년이〉가 아니라 〈옥경혜랑〉, 〈문옥경〉인 수준이에요. (웃음) 이외에 관심이 가는 커플링은 영서X주란인데, 신예은 배우님과 우다비 배우님이 실제로 고등학교 선후배 관계이고, 우다비 배우님의 인터뷰를 보면 신예은 배우님이 학교에서 옥경 같은 존재였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4) 두 분이 현장에서 같이 찍은 사진도 많은 편이고요.
추가로 재밌는 건 팬들이 본인이 응원하지 않는 커플링은 뮤트를 해놓는다는 점이에요. 영서X주란을 응원하는 팬들은 정년X주란을 뮤트하는 식으로요. (웃음) 이런 팬들의 활동에는 연출이 주는 영향도 있겠지만, 드라마 메이킹 영상과 배우들의 SNS 계정 등을 통해 드러나는 이들 간의 친밀함이 팬들로부터 계속해서 2차 창작을 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고 생각해요. 심지어 팬들이 얼마나 로맨틱하냐면, 작품이 끝나면 착즙할 수 있는 요소가 줄어들기 마련이잖아요. 그래도 정은채 배우님과 김윤혜 배우님이 나중에 본인들의 첫 여성 커플 연기를 상기할 때 서로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는 거예요.


박주연:

팬들이 정말 애절하다.


연혜원:

제 X의 타임라인에서 옥경X혜랑을 응원하는 분들은 대부분 정은채 배우님의 팬인데 김윤혜 배우님을 같이 좋아하더라고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사진이 SNS에 올라오길 염원하고 이 관계가 앞으로도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많이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고요.


문아영:

드라마 후반부에 주인공인 정년과 퀴어적 정동을 형성해 온 주란이 매란국극단을 떠나 결혼하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시청자들 사이에 거센 비판이 있었어요. 이를 포함해 드라마 〈정년이〉의 각색과 연출에 관해 두 분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해요.


박주연:

저는 어째서 드라마를 이런 방식으로 마무리 지었는지 이해가 안 돼요. 정지인 감독님의 인터뷰를 보면 드라마에서 부용을 삭제한 이유로 제한된 회차 안에서 주인공 정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고 말씀하시거든요.5) 그런데 드라마를 모두 시청했음에도 이때의 선택과 집중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단지 여성국극에 관한 이야기를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한 걸까요? 어째서 여성국극이 갖고 있는 페미니즘적 의미와 퀴어적인 의미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금의 방향을 선택한 건지 이해하기가 어려워요. 드라마 중반까지만 해도 가급적 수용적인 마음으로 시청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회를 보고 나서는 의아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도대체 이 드라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없다는 게 지금의 감상이에요.


연혜원:

아니, 누가 봐도 주란이 다시 매란국극단에 돌아오는 게 서사적으로 임팩트가 있지 않나요? 저는 원작을 알지 못하는 친구가 주란의 결혼 소식에 당혹스러워할 때 원작에서 부용이 결혼하지 않고 정년을 다시 만나는 것처럼 주란도 그럴 거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주란이 다시 돌아온다면 드라마 〈정년이〉를 선해할 여지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주란이 돌아오지 않은 채 드라마가 끝나는 거예요. 드라마의 마지막 회가 끝나고 제 X의 타임라인에 있는 모두가 당혹스러워했던 게 기억나요. 주란이 정년에게 되돌아오는 결말을 선택했어도 연세가 있는 시청자들도 이해했을 것 같아요.


박주연:

그러니까요. 대중의 이해에 크게 반하지 않았을 텐데.


연혜원:

호모포비아들은 주란과 정년이 다시 만났어도 끝까지 우정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매란국극단으로 돌아온 주란이 정년에게 같이 여성국극 잘 해보자고만 했어도 괜찮은 결말이었을 텐데요. 저는 드라마가 끝났는데도 에필로그가 더 있는 줄 알았어요.


박주연:

저는 드라마 〈정년이〉의 주요 타겟층이 20-30대 여성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여성 인물이 많이 나오는 작품에서 주란을 결혼시킨다는 선택이 당시 시대적 배경을 따른 것이라면, 어째서 퀴어캐릭터에 관해서는 퀴어의 역사를 따르지 않은 건지 의문이에요.


문아영:

두 분 말씀에 공감해요. 저도 마지막 회를 보는데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나더라고요. 한편으로는 드라마가 정년과 주란을 급하게 떼어놓아야 할 정도로 두 사람 간의 퀴어적 정동이 그토록 위협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둘 중 한 명을 이야기 바깥으로 내보내야 할 만큼 제작진과 방송국에서 위기감을 느꼈나 싶은 거죠. 누군가에게는 주란이 정년에게 했던 말들이 굉장히 애매한 감정으로 비칠 수 있는데도요. 그래서 오히려 지금의 결말이 주란에 대한 시청자의 기대를 저버릴 만큼 드라마가 정년과 주란의 관계를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연혜원:

저한테 드라마 속 정년이라는 캐릭터는 매력을 느끼기 어려운 인물이었는데요. 정년 역의 김태리 배우님은 훌륭한 배우이시고 역할에 최선을 다하셨지만, 극 중 합이 맞는 사람이 없다 보니 정년이라는 인물이 가진 개연성이 없어져 버렸다고 느꼈어요. 원작에서 정년이 매력적인 주인공일 수 있었던 건 정년과 부용의 여성국극의 배우와 팬이라는 관계와 레즈비언 로맨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건데 부용이 사라지게 되니 매란국극단의 모든 인물이 정년을 중심에 두고 움직이는 모양새가 돼버린 거죠. 배우가 무대에서 혼자 빛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게 매란국극단이 말하고자 했던 교훈 아닌가요? 무대에서 한 명의 인물만 튀어서는 안 되고 모든 인물 간의 합이 중요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을 봐야 한다는 게 정년이 어렵사리 얻은 깨달음이었잖아요. 이런 상황이다 보니 김태리 배우님이 아무리 열연을 해도 정년이 가진 매력과 설득력이 점차 사라져 버리는 거죠.
그래서 저는 새삼스럽게도 영화 〈아가씨〉(2016)에서 숙희 역의 김태리 배우님이 레즈비언들에게 매력적일 수 있었던 건 히데코 역의 김민희 배우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어요. 웹툰 〈정년이〉의 서이레 작가님과 나몬 작가님도 정년이라는 인물을 설정할 때, 〈아가씨〉에 나온 김태리 배우님의 이미지를 참고했다고 밝혔잖아요.6) 그런데 숙희가 곧 김태리 배우님인 건 아니었던 거죠. 다시 말해 〈아가씨〉는 숙희와 김태리 배우님의 관계성이 아닌 숙희와 히데코의 관계성이 핵심인 작품이었던 거예요. 이 밖에도 공연 〈쌍탑전설〉이 사람들로 하여금 드라마틱하게 느껴질 수 있었던 이유가 부용이 쓴 대본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기 때문이잖아요. 그런데 부용이 없으니까 왜 드라마의 마지막에 〈쌍탑전설〉이 공연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매란국극단의 철학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는 게 너무 슬픈 결말이었어요.


ⓒ 정년이 대본집 세트, 최효비, 다산책방, 2024 ⓒ 정년이 대본집 세트, 최효비, 다산책방, 2024.

문아영:

드라마 〈정년이〉가 종영한 다음 날 대본집과 코멘터리북을 홍보하는 과정에서 동성 인물 간의 키스신이 편집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있었어요. 한국의 드라마가 동성 간의 성적인 접촉을 다루는 문제에 관해 두 분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박주연:

2025년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아직까지 이럴 일인가 싶어요.


연혜원:

되게 복잡한 마음이 드는데요. 사실 키스신이 모든 걸 설명해 주는 건 아니잖아요. 만약 정년과 주란, 옥경과 혜랑이 키스하는 장면이 방영됐어도 드라마 〈정년이〉는 퀴어베이팅 작품이에요. 왜냐하면 주란과 옥경을 이야기에서 증발시켜 버렸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키스신은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지만, 동시에 키스신이 삭제됨으로써 이들의 키스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해요. 동성 간의 스킨쉽이라는 게 키스를 해야만 사랑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나 이 사회가 동성 간의 스킨쉽을 금지하고 차별하고 있는지 드러내는 거죠.
정확히 이 지점에서 드라마의 대본집과 코멘터리북을 제작한 출판사가 정년과 주란, 옥경과 혜랑의 키스신을 전면에 두고 홍보를 진행했잖아요. 그게 저는 굉장히 모욕적이고 굴욕적이라 느껴요. 동성 간의 키스는 한국 사회에서 ‘정상’이 아니라는 낙인을 찍음으로써 ‘정상’이 아니기 때문에 더 잘 팔린다는 걸 보여주는 거잖아요. 동성 간의 성적인 접촉을 영원히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방식인 거죠. 드라마에서는 동성 간의 키스가 재현돼서는 안 되는 것으로 물화되는 거고, 출판사에서는 가장 상품이 잘 팔릴 수 있는 대목으로 또다시 물화되는 거죠.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동성 간의 스킨쉽을 호기심으로 소비하게 만드는 거예요. 일종의 상품으로서요.


문아영:

저는 출판사에서 대본집과 코멘터리북을 홍보하는 모습을 보고 이들이 동성 간의 키스신을 일종의 담보로 잡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리고 직접 보고 판단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대본집과 코멘터리북을 구매했는데요. 드라마에서 삭제된 키스신이 대본집에 수록됐다고 한다면, 코멘터리북에 해당 키스신이 왜 편집되었는지 약간의 설명이라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조차 없는 거예요. 아니, 대본집에 키스신이 수록되었다는 것만으로 본인들의 제작 의도와 한국 사회의 성소수자 차별적인 구조를 모두 알아달라고 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일 아닌가요?
제작 과정에서는 해당 키스신을 촬영했지만, 결국 편집해야 했다는 이런 태도가 어째서 동성 간의 키스신은 비하인드로만 존재해야 하는지 스스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드라마의 시청자와 팬들이 그저 이해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보여요. 제작진의 이런 모습이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부터 부용이 작품에서 삭제된 이유를 직접적으로 밝히지 못했던 것과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끝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재현의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방식으로요. 저한테는 이런 행보가 드라마 속 어떤 연출보다 가장 많이 화가 났던 지점이었어요.


박주연:

한국의 미디어가 섹슈얼리티를 다루는 방식에 너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요. 일례로 한국에서는 배우 간의 신체적 접촉과 노출 장면을 촬영할 때, 촬영 환경과 배우의 상태를 확인하고 조정하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활동하는 모습을 찾기 어려워요. 전해 듣기로 일본에서는 일이 몰릴 만큼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에 대한 수요가 높다고 알고 있어요. 창작자들 사이에 이러한 직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는 거죠. 그런데 한국은 배우 간의 신체적인 접촉을 만드는 일이 연출자의 판단을 기준으로 어떤 장면은 삭제해도 괜찮고 또 어떤 장면은 금방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아요.


연혜원: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런 부분이에요. 그렇게 퀴어가 지워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면 어째서 이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는 건지, 이 설명하지 않음에서 알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해요. 아니, 정치인들을 보면 얼마나 솔직해요. 호모포빅한 발언을 스스럼없이 하잖아요. 결국에는 창작자들도 작품에서 퀴어가 지워지는 일이 지금 사회에서 비판받는 일이라는 걸 안다는 이야기인 거죠.


박주연:

지금은 많은 K-드라마가 해외로 수출되잖아요. 해외의 시청자들이 있다는 걸 아는 데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창피한 거죠.


연혜원:

그러니까요. 저는 이런 지점에서 퀴어베이팅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의 콘텐츠들이 윤리적인 설명을 하는 걸 영원히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런 와중에 퀴어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계속 헤매야만 하는 거고요. 사실 콘텐츠가 퀴어를 포함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를 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언어를 줄 수 있는데도 한국에서는 콘텐츠가 이런 역할을 하지 않기 때문에 퀴어들은 영원히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거죠. 정말 윤리적이지 않고 호모포빅한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문아영: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을까요?


박주연:

제가 요즘 계속 반복해서 하는 말인데, 한국의 미디어 산업은 다양성의 측면에서 뒤처져도 너무 뒤처졌어요. 서구 영미권이 아닌 다른 아시아 지역의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도요. 일련의 K-드라마와 K-영화 담론에 어깨를 으쓱할 때가 아니라는 걸 제작사와 투자사가 모두 알았으면 해요. 다양성과 포용성에 대해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정말 한없이 뒤로 밀려날 거예요.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결국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이야기도 만들지 못할 거라 생각합니다.


연혜원:

최근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한국어로 이루어진 퀴어서사가 이렇게 부족한 건 한국의 퀴어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박탈시키는 문제라고요. ‘이야기’를 향유하는 것은 삶의 기본권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이 사치재로 여겨져서는 안 돼요.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읽고, 보고, 들으면서 삶을 성찰하는 동시에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해 상상할 수 있어요. 이건 인간이 사회성을 길러나가는 데 필수적인 행위죠. 그러나 퀴어들, 특히 한국의 퀴어들은 미디어에서 자신과 유사하거나 유사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는 경험이 너무 희박해요.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퀴어는 무엇으로 퀴어의 삶을 성찰하고, 상상하며, 실험해 봐야 하나요?
그런 의미에서 퀴어베이팅은 퀴어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미디어에서 퀴어를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이자 커밍아웃할 수 없는 존재,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거나 사라지는 존재로 반복해서 그리는 일이 퀴어가 자신의 삶을 상상하는 데 있어 얼마나 큰 폭력으로 다가오는지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한국의 미디어에서 퀴어베이팅과 더불어 퀴어가 비가시화되는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이야기돼야 해요.


박주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서 일하고 있고 책 『누가 나만큼 여자를 사랑하겠어』(2024)를 썼다. 드라마와 영화 속 퀴어서사가 날 살리고 키웠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덕후. 요즘은 태국 여자들이 내 심장을 뛰게 하고 있다.


연혜원

아이돌 팬덤에서 처음 퀴어 친구들을 만났다. 그 경험으로 『퀴어돌로지』(2021)를 기획하고, 쓰게 되었다. 팬픽을 낭독극 〈에로 그로-경성〉(2020)으로 기획하는 과정에서 퀴어예술에 접속하였고, 현재 퀴어예술매거진 『them』을 발행하고 있으며, 퀴어예술연대와 한국퀴어연극아카이브의 팀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회학 연구자이며 투명가방끈 활동가이기도 하다. 2024년에는 희곡집 『가장자리를 위한 복수 노트』를 썼다. 언제나 정치적인 글을 쓰려고 한다.


문아영

퀴어영화 연구그룹 구성원. 퀴어영화에 관한 다양한 글을 기획하고 발행한다. 퀴어예술매거진 『them』의 에디터로 퀴어웹툰에 관한 인터뷰와 대담을 기획했다. 사랑하는 동료들과 서울여성독립영화제를 만들고 있으며, 여성영화와 퀴어영화를 관람하고 연구한다.


본 대담은 비온뒤무지개재단 2024 이창국퀴어연구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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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혜연, 「우다비 "세 명의 남자 사랑 독차지, 못 해본 경험…신선했어요"[SS찜콩②]」, 스포츠서울, 2019.09.04. (검색일: 2024.12.18.) 〈https://www.sportsseoul.com/news/read/813753〉
2) 함상범, 「우다비 “터닝 포인트 ‘정년이’ 꿈만 같았던 김태리·정은채·신예은” [SS인터뷰①]」, 스포츠서울, 2024.11.28. (검색일: 2024.12.18.) 〈https://www.sportsseoul.com/news/read/1480017?ref=naver〉
3) 듀나, 「‘정년이’가 대박 났다고 지레 겁먹고 뒤로 빠진 각색자들이 용서되는 건 아니다」, 엔터미디어, 2024.11.21. (검색일: 2024.12.18.) 〈https://www.entermedi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711〉
4) 함상범, 위의 기사.
5) 조현나, 「[기획] 아마도 이건 불가항력 - 드라마 〈정년이〉 미리보기」, 씨네21, 2024.08.22. (검색일: 2024.12.18.) 〈http://m.cine21.com/news/view/?mag_id=105697〉; 문지연, 「[SC현장] MBC와 법적 분쟁·부용이 삭제..김태리 '정년이', 문제작에서 화제작으로(종합)」, 스포츠조선, 2024.10.10. (검색일: 2024.12.18.) 〈https://sports.chosun.com/entertainment/2024-10-10/202410100100070020009304〉; 유원정, 「"원작 메시지 아쉽지만…" '정년이' 정지인 PD의 딜레마[EN:터뷰]」, CBS노컷뉴스, 2024.12.18. (검색일: 2024.12.18.) 〈https://www.nocutnews.co.kr/news/6261429?utm_source=naver&utm_medium=article&utm_campaign=20241218050042〉
6) 한소범, 「1950년대 국극 웹툰 ‘정년이’ … “배우 김태리를 모델로 그렸어요”」, 한국일보, 2020.05.21. (검색일: 2024.12.18.)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5191863789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