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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와 ‘대도시의 사랑법’ 대담 (상): 퀴어문학과 퀴어영화 겹쳐 읽기

2025년 2월 27일

오혜진ㆍ문아영ㆍ이문우

(좌)ⓒ 소설 『딸에 대하여』, 김혜진, 민음사, 2017. (우)ⓒ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창비, 2019. (좌)ⓒ 소설 『딸에 대하여』, 김혜진, 민음사, 2017. (우)ⓒ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창비, 2019.


문아영: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저는 퀴어영화 연구그룹에서 활동하는 문아영입니다.


이문우:

저는 아영님과 함께 퀴어영화 연구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문우입니다.


오혜진:

문학평론 쓰는 오혜진입니다.


문아영:

최근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딸에 대하여〉(2024)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2024), 그리고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2024)이 공개되었는데요. 소설이 출판되고 영화와 드라마가 공개되기까지 약간의 시차가 존재합니다. 각 작품을 처음 봤을 때의 감상은 어떠셨나요?


이문우:

먼저 저는 소설 『딸에 대하여』(2017)를 비평 수업에서 읽었는데요. 당시 레즈비언 소설을 대상으로 한 비평의 흐름에 “생존-퀴어”라는 키워드가 있어서 생존권에 관심을 두고 읽었습니다.1) 시간이 흐르고 영화를 봤을 때는 돌봄이라는 이슈와 상호 의존, 관계망 같은 부분에 관심을 두고 보게 된 것 같고요.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보고 나서는 동시대의 게이 남성에 대한 판타지가 이제 여성을 지켜주고 안전함을 보장하는 무해한 남성에 대한 판타지로 구성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은 데이팅 어플이나 클럽씬 같은 하위문화 재현과 주인공 고영(이하 영)의 생활에서 묻어나는 HIV/AIDS에 대한 재현을 관심 있게 봤고요.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2019)은 아무래도 가장 마지막에 봤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와는 어떤 부분이 다른지 생각하면서 봤습니다.


문아영:

저는 소설 『딸에 대하여』를 비정규직 고학력자 여성이라는 위치와 성소수자 자녀로서의 삶에 공감하면서 읽었던 것 같아요. 다만 당시에는 레인이 수행하는 가족 내에서의 돌봄이 공감되지 않았는데, 7년이 지나서 소설과 영화를 다시 보니 훨씬 돌봄과 질병,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와닿았어요. 지금은 누구나 돌봄의 역량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고 박상영 작가님의 소설은 출간될 때부터 좋아했고,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는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을 가장 좋아했어요.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는 5-6화 〈대도시의 사랑법〉과 7-8화 〈늦은 우기의 바캉스〉를 인상 깊게 봤고요.


오혜진:

『딸에 대하여』가 출간된 2017년에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작품이 다소 보수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었어요. 두 가지 면에서 그렇게 느꼈는데요. 첫 번째는 ‘젊은 레즈비언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성세대 엄마’라는 구도 때문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소설이 집필되고 출간된 2015-2017년의 퀴어페미니즘 정치는 널리 대중화되면서도 첨예하게 분화하고 있었죠. 2015-2016년에 메갈리아와 강남역 살인사건 등을 계기로 페미니즘 담론이 강력하게 재부상했고, 2017년에는 차별금지법제정연대가 재출범하는 등 소수자 차별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어요. 이 문제를 법적·제도적 차원에서 의제화하려는 움직임도 무척 활발했고요. 그런 시기에 성소수자의 시민권 문제를 ‘(이성애자로 젠더화된) 기성세대의 이해를 요하는 문제’로 재현하는 이 소설의 기획이 다소 불철저하게 여겨졌어요. 실제로 당시 이 소설과 관련해 퀴어 시민권 문제를 세대갈등의 프레임으로 다루는 평론이 제출되기도 했고요. 하지만 제가 판단하기에 그 시점에 성소수자의 시민권 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이미 훨씬 더 급진적으로 전개되고 있었거든요. 퀴어 시민권은 ‘보통 사람’의 이해나 선량한 의지, 사회적 합의 따위와 무관하다는 것, 그건 누구에게나 부여된 기본권이자 민주주의의 대원칙이며, ‘누가 공동체의 구성원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야말로 당대의 긴요한 문제의식이었죠.
두 번째는 이 소설에서 강조하는 ‘돌봄과 가족’이라는 주제의 재현방식이 다소 낡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었어요. 소설에서 그린의 연인인 레인이 수행하는 돌봄은 인간의 보편적 소양이라기보다는 마치 며느리의 역할처럼 젠더화된 수행으로 보였거든요. ‘나’의 집에 얹혀살면서 수행하는 레인의 돌봄은 그 자신을 돌보는 일이라기보다 파트너의 어머니에게 자신의 존재와 쓸모를 인정받기 위한 노동으로 보였어요. 최근 이 소설을 다시 읽었을 때는 조금 다른 감상을 갖게 됐지만, 레인의 돌봄노동이 성역할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완전히 떨쳐지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소설의 설정을 충실히 따른 영화 〈딸에 대하여〉가 개봉한 2024년은 소설이 발표된 2017년에 비해 돌봄 의제가 한층 더 다채롭게 논의되고 있고, 이로써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 컨텍스트가 더 풍성해진 상황이죠.
『대도시의 사랑법』은 「재희」, 「대도시의 사랑법」, 「우럭 한 점과 우주의 맛」, 「늦은 우기의 바캉스」 이렇게 총 네 편의 단편소설이 함께 묶인 연작소설의 형식으로 2019년에 발간됐는데요. 소설의 서사적 현재인 2018-2019년에 있었던 퀴어페미니즘 정치의 현안들, 이를테면 낙태죄 폐지나 HIV 노출 전 예방요법 프렙(PrEP, Pre-exposure prophylaxis for HIV)의 국내 도입 문제 등을 기민하게 포착 및 재현하고 있어서 제게는 동시대의 문화적 아카이브로서도 각별하게 생각되는 작품입니다. 네 편의 수록작 모두 각각의 의의와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재희」만 따로 떼어내 영화로 만들어진 걸 보고, 대중과 다소 동떨어진 제 취향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게 됐죠. (웃음) 물론 「재희」가 유독 상업영화의 원작으로서 적절하게 여겨진 맥락 또한 짐작 못 할 바는 아니고요. 아무튼 원작 「재희」에 적지 않은 서사적 변용을 감행해 만들어진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 그리고 네 명의 연출자가 『대도시의 사랑법』 수록작 네 편을 제각기 맡아 연출한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이 연이어 공개돼 흥미롭습니다. 『대도시의 사랑법』의 미디어믹스 현상을 분석해 볼 만한 시점이죠.


이문우: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예고편은 헤테로베이팅이라는 비판이 있었고,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의 예고편은 혐오 세력의 민원으로 얼마간 비공개되는 사건이 발생했었는데요. 일각에서는 전자의 홍보 방식의 오히려 혐오 세력의 행동을 막고 비퀴어관객을 유입하는 전략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어요. 이렇게 퀴어콘텐츠가 유통되고 홍보되는 과정을 볼 때, 지금 한국 사회에서 퀴어소설과 퀴어영화, 그리고 퀴어드라마의 위치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문아영:

저는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제작진이 퀴어서사를 마치 퀴어서사가 아닌 것처럼 홍보한 게 문제라는 생각을 했어요. 원작 소설이 이미 퀴어소설로 인기를 얻고 문학적으로도 인정을 받은 작품이니까 그런 부분을 홍보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아쉽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소수자에 대한 작품을 만든다는 건 텍스트의 내용뿐 아니라 제작과 홍보, 유통 과정에서도 고민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데, 그런 노력이 덜 보이지 않았나 싶어요.


오혜진:

무슨 말씀인지 이해됩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퀴어베이팅’, ‘헤테로베이팅’ 같은 용어들을 비평적으로 선호하지는 않아요. 그 용어들은 ‘퀴어’와 ‘퀴어 아닌 것’이 별도로 존재하며 그것들은 명백하게 구분 가능하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퀴어’를 그런 용법으로 사용하지는 않고요. 또 비평 대상이 되는 대부분의 사안들은 명백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모호하거나 너무 복합적이어서 더 정교한 분석과 자유로운 상상력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니 저는 그 용어들을 사용하기보다는 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게이 남성과 이성애자 여성의 관계성을 다루는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예고편은 분명 이 영화를 이성애 로맨스 서사로 짐작하게 만드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그건 이 예고편의 명백한 ‘의도’였어요. 그러니 그에 대해 ‘퀴어영화를 왜 헤테로 로맨스처럼 보이게 하느냐, 왜 예고편에서 퀴어를 지우느냐’라고 비판하는 건 그다지 타격감이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오히려 예고편이 왜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를 물어야겠죠. 영화는 구재희(이하 재희)와 장흥수(이하 흥수)의 미묘한 관계를 다뤄요. “재희랑 흥수 동거한대”라거나 “재희가 흥수 아이를 지웠대” 같은 소문들이 보여주듯, 타인에게 둘은 손쉽게 이성애 커플로 인식되죠. 그런데 둘의 관계에는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복잡성이 있다는게 이 서사의 핵심이잖아요. 즉 영화의 예고편은 이 영화가 문제화하려는 바로 그것, 젊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오직 이성애적 관계로밖에 상상하지 못하는 사회적 통념을 모방하고 패러디하는 전략을 취한 거죠. 상업영화로서 그런 광고전략은 기만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영민한 선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예고편의 재현문법 자체라기보다 결국 ‘이 영화가 누구에게 어필하고 어떤 욕망에게 말을거는가’일 거예요. 이따 자세히 말하겠지만, 저는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은 퀴어관객의 퀴어한 욕망을 자극하거나 전유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의 예고편이 혐오 세력의 민원으로 인해 일정 기간 동안 비공개 처리된 사건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이 사건은 성소수자 혐오에 근거한 문화적 폭력이죠. 그런데 이 사건을 ‘성소수자 혐오 피해 사례’라고만 기록한다면 불충분할 듯해요.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은 티빙이라는 OTT 플랫폼, 즉 대자본이 투여된 시장에서 나름의 매체전략을 시도하는 콘텐츠입니다. 제가 보기에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예고편이 이성애 로맨스로의 오해를 유도했다면,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의 예고편은 BL물의 이미지와 스타일을 적극 차용함으로써 BL 콘텐츠를 소비한 경험이 있는 (주로 여성인) 구독자층의 시선을 끌고자 했어요. OTT 플랫폼의 구독자 중 상당수가 BL물과 친화력 있는 여성 집단이기 때문이죠. 웹소설과 팬픽, 만화, 드라마, 영화 등 모든 장르를 망라하며 BL물을 애호하는 여성들의 정치적·문화적 욕망이 무엇인지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는 않았습니다만, 현재 대다수의 OTT에서 퀴어드라마가 일종의 장르가 된 것은 이들의 존재와 긴밀한 관련이 있죠.
『대도시의 사랑법』의 미디어믹스 현상을 주의 깊게 보고자 한다면, ‘상업영화-이성애자 관객’을 주된 소비자층으로 상정하는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과 ‘OTT 시장-BL 애호층’을 겨냥한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이 각기 다른 매체전략을 지닌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두 매체에 투여되는 자본의 규모와 성격, 그리고 관객과 구독자의 성격 등이 어떻게 같거나 다른지 따져봐야죠. 혐오 세력의 민원으로 인해 예고편을 비공개한 사건이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의 홍보 면에서 어떤 효과를 가졌는지는 이런 매체전략에 대한 고려가 있을 때, 더 섬세하게 논의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문우:

저는 퀴어소설과 영화, 드라마 각각의 위치에 대해서 생각했는데요. 사실 『대도시의 사랑법』이 문학계에서는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후보에도 올라가고 퀴어소설로 많이 알려졌는데, 영화가 개봉할 때는 작품이 퀴어서사를 담고 있다는 게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아요. 추측건대 퀴어소설의 경우에는 다른 매체에 비해 수요층이 한정되어 있어서 비교적 혐오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한 부분이 있는 것 같고요.
한편으로 저는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의 예고편에서 헤테로베이팅이 전략적으로 효과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이성애자를 겨냥했다고 하기에도, 퀴어를 겨냥했다고 하기에도 모두에게 실망스러운 반응을 얻게 된 것 같아서 결국은 이게 누구를 위한 마케팅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드라마는 세 매체 중에서 가장 혐오 세력의 공격을 받기 좋은 위치에 있는 것 같은데요. 동시에 드라마는 이따금 워맨스라는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성연대와 레즈비언 로맨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워맨스 장르에서 튀어나온 게 드라마 〈마인〉(2021)의 커밍아웃 장면이 아니었나 싶고요.


오혜진:

제 주변 반응을 보자면 이성애자 여성은 물론, 비이성애적 성별·성애 실천자들 모두 대체로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에 호의적이더라고요. 이 영화가 헤테로 관객과 퀴어관객 모두 어느 정도 만족시켰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언할 순 없죠. 헤테로 관객과 퀴어관객이 반드시 서로 구별되는 욕망과 취향을 가진다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겠어요? 오히려 영화는 헤테로 (여성)관객과 퀴어관객이 협상하고 타협할 수 있는 어떤 지점을 영리하게 찾아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비겁하게 그 지점에서 멈췄다고 말할 수도 있고요.
‘드라마가 다른 매체에 비해 혐오 세력의 공격을 받기 쉽다’는 가설은 저로서는 좀 유보하게 됩니다. 드라마도 여러 층위와 종류가 있잖아요. TV 드라마, 웹드라마, OTT 기반 드라마는 각각 시청자와 구독자층의 성격은 물론, 매체로서 지닌 문화적 위상도 다르죠. 드라마가 영화보다 광범위한 접근성을 가질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요.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은 티빙이라는 유료 OTT 플랫폼의 구독자들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본편이 방영되기도 전에 ‘동성애를 미화하고 조장한다’며 해당 콘텐츠에 대한 비난을 쏟아낸 ‘일부 시민단체’는 애초에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의 소비자층과 무관한 집단일 가능성이 크죠. 그렇다면 이들의 공격은 노이즈 마케팅 같은 효과를 초래했을지언정 그로 인해 이 콘텐츠가 소비자를 크게 잃거나 취약해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문아영:

저는 혐오 세력이 드라마 방영과 관련해 공격을 한 배경 중 하나가 이 작품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OTT 특화콘텐츠 제작 지원작으로 선정되어 공적인 지원을 받은 데 있다고 알고 있어요. 만약 이 드라마가 지상파에서 방영되었다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지상파에서 이런 작품을 유통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겠죠. 그런데 〈대도시의 사랑법〉은 OTT 플랫폼에서 유료로 제공되는 작품임에도 공공기관의 제작 지원이 있었다는 이유로 예고편이 비공개되면서 홍보에 차질이 생긴 거잖아요. 앞에서 혜진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해당 매체에 어떤 자본이 투여됐는지가 퀴어콘텐츠에 대한 혐오를 이야기할 때, 중요하게 살펴볼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상황에도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이 혐오 세력의 공격에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제작진이 제작발표회에서 이를 작품에 대한 일종의 관심으로 해석하는 등 유쾌한 태도를 보여줬던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2)


ⓒ 영화 〈딸에 대하여〉, 이미랑, 2024. ⓒ 영화 〈딸에 대하여〉, 이미랑, 2024.


문아영: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소설 『딸에 대하여』와 영화 〈딸에 대하여〉는 각각 엄마의 내면을 드러내는 방식과 결말 등에서 차이를 찾아볼 수 있는데요. 두 분께서는 영화의 각색과 연출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으신가요? 영화에서 다뤄지지 않았어도 소설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었다면 함께 말씀 부탁드려요.


이문우:

제가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생존권의 문제를 생각했던 건 결말이 엄마의 변화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어요. 이와 달리 영화는 좀 더 희망적인 장면을 삽입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마치 누군가의 꿈을 들여다보듯 엄마와 그린, 레인, 젠/이제희(이하 제희)가 모두 모여 앉아 빵을 나눠 먹던 모습이요.3)


문아영:

소설은 대사가 없어도 인물의 내면을 가감 없이 들여다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영화는 내레이션과 보이스오버를 사용하지 않고 엄마의 대사를 많이 줄여서 오히려 엄마의 침묵이 그린과 레인의 주저하지 않는 행동과 대비되어 보였어요. 그리고 문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소설은 엄마가 장례식장에서 잠이 들면서 그린과 레인에 대한 이해를 유보한 것처럼 보이는데, 영화는 이야기의 끝에 엄마가 다른 성소수자 커플을 보고 슬며시 웃는 모습을 보여주잖아요. 이런 장면들이 영화가 원작과 큰 차이를 두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제가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건 배우들의 캐스팅이었는데요. 오민애 배우님은 영화 〈굿 마더〉(2020)에서 성소수자 부모 역할을 맡으신 경험이 있고, 하윤경 배우님은 영화 〈저 ㄴ을 어떻게죽이지?〉(2021)에서 동성과 키스하는 장면으로 SNS에서 주목을 받으시기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두 배우님이 영화 〈딸에 대하여〉 이후에도 계속 성소수자와 관련된 필모그래피를 쌓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그리고 짧게 지나가는 장면이지만 레인이 일하는 식당에서 그린과 레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좋아해요. 소설에서는 레인이 어떤 일을 하는지만 언급될 뿐, 엄마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레인이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없잖아요. 잠깐이지만 영화가 레인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준 게 반갑게 느껴졌어요.


오혜진:

소설과 영화의 톤이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아요. 문우님 말씀처럼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소설에 비해 조금 더 희망적인 암시를 주긴 하지만, 대체로 소설과 영화 모두 엄마와 딸이 서로 화해하거나 이해하는 모습을 명시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드라마틱한 화해나 연대가 없는 게 김혜진 작가 특유의 윤리이기도 하고, 영화 역시 그 태도를 존중했다고 생각해요. 다만, 소설과 영화 모두 젠/제희를 돌보는 과정을 통해 엄마가 가족과 돌봄에 대해 이전과 다른 생각을 갖게 됐으리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죠. 그런데 의아한 점이 있어요. 그린이 대학에서 동료 강사가 당한 부당해고에 반대하기 위한 투쟁에 참여하는 설정이요. 그건 이 서사에서 그린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죠. 그린은 그 활동을 하느라 거의 집에 없어요. 그래서 레인이 그린의 엄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상호교감의 지점들을 만들어내게 되죠. 서사에서 그린은 상대적으로 후경화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사는 그린의 부재를 유의미한 사건으로 만들어야겠죠.
그린이 집회에 참여하는 에피소드에서 핵심은 이겁니다. 부당해고를 당한 사람은 그린이 아니지만 그린은 동료를 위해 연대하고 있다는 것, 동료가 당한 일은 그린 자신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거죠. 즉 그린은 동료와 법적 가족이 아니지만 동료를 돌보고 있고, 그로 인해 자신도 돌보는 거예요. 그린의 엄마와 레인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돌봄을 통해 가족이 될 수 있는가’를 질문할 때, 그린도 동료가 당한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투쟁을 통해 사회적 돌봄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 대학 시간강사의 부당해고 문제는 단순하지 않죠. 이는 대학에서 비정규직 강사가 처한 불안정하고 불합리한 노동조건과 관련되고요. 또 그 부당해고의 원인이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 즉 강사의 성적 지향에 있다는 것이 암시되는 만큼 성소수자의 노동권 문제와도 직결되죠. 그런데 소설과 영화 모두 어느 순간부터 이 대학 시간강사의 부당해고 사건을 잊어버려요. 사건의 결론을 보여주지 않고 향후 진행과정을 보여주지도 않죠. 또 그 사건이 그린을 비롯한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성실하게 추적하지도 않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그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그린의 정의로운 성격을 보여주고, 그린과 동료들의 연대를 통해 ‘돌봄’이라는 소설의 핵심주제를 강조하는 정도로만 쓰여요. 김혜진 작가가 소설집 『어비』(2016) 등에서 인상 깊게 보여준 비정규직의 노동권 문제에 대한 천착을 상기한다면, 대학 강사의 부당해고 문제를 이런 식으로 봉합하는 『딸에 대하여』의 서사는 좀 아쉽습니다.
그린과 레인이 처한 문제적인 상황은 이들이 단지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발생한 것만은 아니에요. 이들은 레즈비언인 데다가 무엇보다 ‘투쟁하는 퀴어’죠. 자신과 연인, 그리고 동료들의 노동할 권리, 거주할 권리, 가족을 구성할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 등 공동체에서 시민으로서 살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인물들이에요.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엄마와 레인이 지닌 돌봄의 역량만을 강조한다면 불충분하죠.


문아영:

말씀해 주신 내용에 공감해요. 저는 소설에서 엄마가 대학의 부당해고 시위 현장을 찾아가는 장면이 영화에도 나왔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소설에서는 엄마가 시위 현장의 혼란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그린과 레인이 싸우고 있는 현실이라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데, 영화에서는 엄마가 택시를 타고 시위 현장을 잠깐 지나간 것만으로 그린이 처한 상황을 모두 파악한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아쉽게 느껴졌어요.
이어서 소설 『딸에 대하여』와 영화 〈딸에 대하여〉는 모두 그린과 레인, 엄마와 젠/제희의 관계를 통해 가족의 모습과 역할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데요. 이들 작품이 말하는 가족에 관한 질문과 상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문우:

제가 인상 깊었던 건 엄마와 제희의 관계였어요. 엄마가 제희를 집으로 데려오려고 할 때, 관계자가 엄마에게 제희와 무슨 관계냐고 묻잖아요. 두 사람이 서로 가족은 아니지만 결국 엄마가 제희를 집에 데려오는 장면에서 영화가 가족이 반드시 혈연이나 법적인 관계, 이성애적 관계로 묶여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 돌봄망이 꼭 그런 식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외에도 함께 부당해고 시위를 이끌고 투쟁하는 사람들과 제희의 장례식장에 찾아와 밤새도록 자리를 지키던 그린과 레인의 친구들 모습이 영화가 답하고자 했던 돌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아요.


오혜진:

소설과 영화 모두 가족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돌봄의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엄마가 그린과 레인에게 너희가 도대체 뭘 할 수 있냐고 묻는 장면이 있어요. 결혼을 할 수 있냐, 자식을 낳을 수 있냐, 남편이 내게 준 것과 같은 성적 쾌락을 서로에게 줄 수 있냐… 등을 따져 묻다가 결국 강조하는 것은 돌봄입니다. 엄마에게 돌봄은 마냥 숭고하지만도 아름답지만도 않은 일이에요. 존엄하고 고귀한 일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똥오줌과 고름, 진물을 치우는 지난한 일이죠.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책임을 수반하는 일이에요. 엄마는 그런 돌봄은 오직 가족만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린과 레인은 어차피 법적 가족이 되지 못하는 관계이니 서로를 책임 있게 돌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소설과 영화는 레인이 법적 가족이 아님에도 그린과 그린의 엄마, 젠/제희를 얼마나 잘 돌보는지 보여줍니다. 그리고 엄마도 자신과 “아무 사이도 아닌” 젠/제희를 돌보죠. 젠/제희도 젊은 날에는 가족이 아닌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었어요. 젠/제희는 필리핀 아동 티팟을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후원했고, 그 자신이 취약한 상황에 이르자 역시 가족관계가 아닌 요양보호사들과 지인들에 의해 돌봐지죠. 결국 레인은 돌봄노동의 성실한 수행을 그린의 엄마에게 인정받음으로써 함께 밥을 먹는 ‘식구’가 됩니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그린과 그린의 엄마, 레인, 젠/제희가 함께 빵을 먹는 꿈 장면으로 재현되죠. 즉 그린과 레인은 법적 가족으로 인정되지는 않지만, 가족이 담당하는 돌봄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유사가족 혹은 대안가족의 지위를 부여받습니다.
그런데 질문하고 싶은 것은 ‘왜 소설과 영화 모두 돌봄과 가족의 관계를 이토록 필연적인 것으로 상상하는가’예요. 두 작품 모두 돌봄이 가족의 일이라는 명제를 의심하지 않거든요. 하지만 그린과 레인이 7년간 정서적·경제적·성적 유대를 이루며 서로를 돌봐온 것은 꼭 (제도적) 가족이 되기 위해서만은 아니죠. 그린의 엄마가 요양원에서 젠/제희를 돌본 것이 요양보호사로서의 직업적 사명 때문이었다면, 젠/제희를 이송된 요양원에서 자의적으로 데려와 자신의 집에서 돌보는 것은 시민적 역량으로서의 돌봄 수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이런 장면을 통해 돌봄에 대한 엄마의 관점 변화를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사실 법적 가족이 아니어도 이미 누군가를 돌봐왔고 누군가에 의해 돌봐지고 있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가족만이 서로를 돌볼 수 있다’고 믿어온 엄마의 생각을 스스로 번복하게 하는 거죠.
즉 돌봄은 가족의 일만이 아니라, 사립 요양원과 같은 시장의 일이기도 하고, 국가적·제도적 지원 및 정책을 요하는 사회적 일이기도 합니다. 또 친구와 이웃, 지인들과 시민들이 함께 수행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돌봄은 그저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공성을 갖는 가치이기도 하다는 거예요. 젠/제희가 무연고환자로서 사립 요양원에 방치되는 것, 나아가 그가 더 이상 요양원에 치료비와 후원금을 낼 수 없는 ‘쓸모없는’ 환자로 규정되는 것은 단지 그에게 가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철저히 ‘법적 가족’ 위주로 설계된 국가의 돌봄정책, 수익성만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장논리 때문이기도 하죠. 젠/제희는 무연고환자입니다. 만약 그린의 엄마가 젠/제희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지 않았다면 젠/제희는 어떻게 될까요? 가족도 없고, 가족의 일을 대신하겠다는 선량한 지인도 없다면 그는 방치돼야 할까요? 국가가 젠을 돌봐야죠. 돌봄을 가족의 필수조건으로 붙박는다면 시민을 돌봐야 할 국가의 책임을 은폐하게 됩니다.
그린과 레인의 관계도 마찬가지예요. 그린과 레인이 서로를 돌보기 위해서 꼭 법적 가족이 돼야만 하는 건 아니죠. 이들에게는 국가와 이웃, 사회제도, 시민단체 등과 연결된 공적인 삶이 있고, 이것들은 이들이 법적 가족이 아니어도 공동체에서 사회적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작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딸에 대하여』는 이 모든 문제를 계속 가족의 과제로 한정해요. ‘돌봄’을 가족에게만 속한 가치로 사유화할 것이 아니라 가족제도의 바깥을 상상하도록 지혜를 모아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박혜경 선생님의 표현을 따르자면, ‘대안가족이 아니라 가족의 대안’4)을 발명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할 때가 된 것 같아요.


이문우:

소설 『딸에 대하여』와 영화 〈딸에 대하여〉의 이야기가 가족의 대안이 아닌 대안가족의 서사라고 생각하시는 이유에 대해 더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오혜진:

두 작품 모두 전통적인 가족에서 행해지던 돌봄을 그린과 레인이 수행하는 모습을 통해 이들이 가족이 될 수 있는지 혹은 없는지를 계속 시험해요. 이때의 돌봄은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관계에서만 가능한 책임’으로 의미화되죠. 그런 책임을 질 수 있는 관계는 오직 가족밖에 없다고 여겨지고요. (법적) 가족이 아닌데도 이런 돌봄을 수행할 수 있는 예외적인 관계가 있다면 그것에게는 유사가족 혹은 대안가족의 지위를 줍니다. 즉 ‘돌봄’의 수행에 있어서 가족의 절대적인 위상 자체는 의심되지 않죠.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지만, 돌봄은 전통적으로 가족이 담당해 온 일이면서도 가족의 차원을 넘어서는 공공성을 지닌 가치이기도 해요. 하지만 『딸에 대하여』는 돌봄의 공공성을 급진적으로 사유하지는 않죠. 잭 핼버스탬은 가족이 아닌 이웃이라도 후원제도나 파트너십 제도를 통해 타인에게 얼마든지 돌봄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해요.5) 최현숙 선생님은 홈리스에게 필요한 돌봄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돌봄만이 아니라, 누군가가 제공하는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돌봄일 수도 있다고 언급하고요.6) 문제는, 전통적인 가족형태 위주로 설계된 국가의 돌봄정책 자체가 계속 돌봄의 사각지대를 만들어낸다는 거예요. 전통적인 가족형태가 거의 쇠멸하면서 돌봄은 이미 가족을 넘어 시장과 제도의 문제로 의제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돌봄 시장과 제도마저 가족을 전제로 한 채 설계되고 작동되기 때문에 가족이 없는 삶을 여전히 상상하기 힘든 거죠. 우리는 종종 돌봄과 책임을 연결 지을 때, 아주 견고하고 지속적인 책임 관계를 상상하지만, 사실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의 형식은 다양하고 그 각각의 관계들에서 가능한 정도로 서로를 돌볼 수 있으면 되죠.
레즈비언 문학에서 ‘돌봄’은 각별한 주제예요. 폭력과 불안 담론에 노출된 여성들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안전하고 안정된 결속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됐습니다. 그 결속은 ‘오직 여성’들로만 이뤄진 것으로 생각되는 경향도 있고요. 이런 상황에서 돌봄 담론이 신중하게 전개되면서 다소 보수성을 띠게 된 것 같아요. 돌봄은 개인적이면서도 공공적인 삶을 위한 보편적 역량인데, 최근 돌봄 담론에서는 ‘생물학적’ 여성 간의 연대와 이해, 굉장히 끈끈하고 긴밀한 정서적 유대 등을 강조하고, 장기적이면서 기록 및 추적 가능한 관계형식으로서의 ‘법적 가족’이 되는 것을 중시하죠. 동성혼 법제화 담론이 부상하는 맥락도 이와 무관하지 않고요. 하지만 우리는 여자들로만 이뤄진 세상에서 살 수 없고, 여자들이 모두 서로를 돌보는 데 진심인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는 결국 이질적인 존재들과 함께 살며 서로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임시적이고 일회적이고 우연적인 관계들,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관계가 아니거나 아주 친밀한 사이가 아니어도 서로를 책임지고 돌보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봐야 해요.


오혜진

문학평론가. 서사·표상·담론의 성정치를 분석하고 역사화하는 일에 관심 있다. 평론집 『지극히 문학적인 취향』(2019)을 썼다. 대학에서 문학비평 및 문화이론을 강의한다.


문아영

퀴어영화 연구그룹 구성원. 퀴어영화에 관한 다양한 글을 기획하고 발행한다. 퀴어예술매거진 『them』의 에디터로 퀴어웹툰에 관한 인터뷰와 대담을 기획했다. 사랑하는 동료들과 서울여성독립영화제를 만들고 있으며, 여성영화와 퀴어영화를 관람하고 연구한다.


이문우

퀴어영화 연구그룹 구성원. 주로 한국퀴어영화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써왔다. 최근에는 교차성의 관점에서 장애와 퀴어 재현을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불구 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많은 것에 게으르지만 백합과 레즈비언 콘텐츠는 꾸준히 찾아본다.


본 대담은 비온뒤무지개재단 2024 이창국퀴어연구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진행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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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건형, 「2018, 퀴어전사 - 前史·戰史·戰士」, 『문학동네』 통권 96호, 문학동네, 2018, 370-377쪽.
2) 이승미, 「“방영 금지 시위? 오히려 럭키비키!”…‘대도시의 사랑법’ 韓퀴어 로맨스의 이정표」, 스포츠동아, 2024.10.16. (검색일 : 2025.01.11.) 〈https://sports.donga.com/article/all/20241016/130229846/1〉
3) 소설 『딸에 대하여』는 해당 인물의 이름을 젠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영화 〈딸에 대하여〉에서는 이제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본 대담에서는 위의 소설과 영화에서 해당 인물을 언급할 때, 각 작품에서 사용되는 이름을 표기하고자 한다. 다만 소설와 영화를 함께 언급하는 경우 젠/제희라는 표기를 사용하고자 한다.
4) 박혜경, 「가족을 넘어선 페미니즘-필요성, 가능성 그리고 미래」, 한국여성민우회 엮음, 『여성주의 학교 ‘간다’: 페미니즘, 경계에서 세상을 말하다』, 지성사, 2008
5) 잭 핼버스탬, 이화여대 여성학과 퀴어·LGBT 번역 모임 역, 『가가 페미니즘: 섹스, 젠더, 그리고 정상성의 종말』, 이매진, 2014.
6) 김영옥의 저서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에 수록된 최현숙과의 인터뷰 「늙은 사람 ‘되기’에는 준거집단이 필요하다」를 참조했다. 김영옥, 『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위즈덤하우스, 2023.